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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방/오늘의 밤

불안을 건너는 법 (9) - 알파

상투적인 자기소개서의 항목이 그렇듯이 사람들은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나를 정의하는 것에 대해 꽤 애를 먹었다. 번번히 나를 어필하는 것에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잘 몰랐다. 하지만 거기에 정답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겨울이 기억난다. 처음 사귄 사람과 헤어지고 내가 정말 '나약하다'라고 느껴진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로, 선택의 중심에 나를 두기로 결심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 과정 속에 있긴 하지만 어쨌든 사용하는 말에 글에 힘이 실렸던 까닭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기 보단 그냥 아는 게 많아져서였다. 나는 끊임없이 불안했다. 하지만 내 그 솜털 같은 마음 안에 굵은 쇠심줄 하나는 분명 박혀 있었다. 나는 내가 쌓아올린 과거라는 성과물이 아닌 현재의 나로부터 자부심을 얻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위해 글을 쓰고 싶다. 무언가와 절대로 맞바꾸고 싶지 않은, 그렇기에 어린 날의 내가 자꾸 나의 기준과 누군가의 기준 사이에서 결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던 이유였다.


그 결과, 그 겨울 이후에 나는 한 번도 같은 곳에 정착한 적이 없었다. 아마 그때가 스물 셋의 겨울이었을 거다. 스물 셋의 겨울엔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기뻐했던 것 같다. 스물 넷엔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겨울밤 공기는 차갑고 냉랭했지만 꿈을 향해 걷고 있단 자부심 때문에 마음은 늘 훈훈했다. 스물 다섯엔 도약을 했다. 돌파구를 찾았고 그에 따른 결과도 처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스물 여섯, 11월의 내가 되기 직전까지 나는 미친듯이 괴로웠다. 타인의 기대와 나의 기대, 가족들의 기대와 내 삶이 자꾸 엇박자를 내니 내가 나에게 실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가장 값진 것을 얻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독특하고 재밌으며 또한 소중하고, 지금 내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내 인생의 기준이자 룰이 돼야 한다는 것을 뜻밖에 얻은 기회로 알게 됐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너무 고맙고 한편으론 아깝다. 미래를 비관하고 자신을 힐난하며 흘려보내기엔 시간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인생은 너무 짧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 인생에 알파를 더하기 혹은 빼기 하며 산다. 때론 전진하며 아니다 싶을 땐 철저하게 무너져서 뒤로 후진하며 어쨌거나 내 인생을 한 곳에서 낡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내 인생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 나는 많은 것을 더하기 했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애쓰느라 많이 빼기도 했다. 지금 나는 제로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하기를 하며 살 것이다. 아니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라는 뼈대에 한 일을 붙여나가며 그런 삶을 축복처럼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훗날 내 육신이 기력을 다해 정말 과거를 추억하는 일밖엔 할 수 없는 순간 그 무수한 더하기들을 바라볼 것이다. 한아름 둘레의 나무에 붙어있는 수 많은 가지 그늘 밑에 앉아 쉬멍 놀멍 그래도 참 애쓰며 살았다고 위안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자리를 뜰 것이다. 그게 내 마지막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