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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기사)

[중앙일보] [시론] 스크린 쿼터 도입하면 예술영화 관객 늘까?


김익상 서일대 영화과 교수 영화기획자
예전에 흥행에 실패한 좋은 한국영화를 봐주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필자도 그 취지에 공감해 학생 10명을 불러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관에 가서 티켓을 끊어준 적이 있다. 다음 날 확인한 결과는 의외였다. 내가 떠난 뒤 여섯 명의 학생이 ‘킬러들의 수다’로 표를 바꿨던 것이다. 이유는 “그게 더 재미있을 거 같아서”란다. 이를 계기로 나는 ‘관객은 시간도 비용에 포함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비용을 되찾기 위해서는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사용한다는 점도 배웠다.

 지난번 중앙일보 10월 14일자에 실린 오동진 영화평론가의 칼럼은 현재 국내 영화시장의 구조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한다. ‘평단의 환호와 지지를 받은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는 민망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한 원인으로 “자신들이 만들고 유통시키는 영화에만 주로 자리를 내줌으로써 작은 외화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국내 대기업 영화사와 스크린 독과점을 지적한다. 해결책으로 어느 한 영화가 스크린 수의 40%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스크린 쿼터’를 도입하고, 추가로 지역 쏠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10개의 스크린을 가진 왕십리 CGV 같은 곳에서 한 영화를 6.3개 이상 상영하지 못하게”를 제시한다. 아쉽게도 이 칼럼에는 영화시장의 다양성 추구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비약과 사실관계의 오류가 있다.

 먼저 ‘평단의 환호와 지지를 받은 작품들’의 상업적 실패를 어떻게 ‘시장의 구조적 왜곡’과 등치시키는 비약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이 말이 타당하려면 “평단의 호평을 받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는 전제가 먼저 참(True)으로 입증돼야 한다. 누가 영화평론가들에게 그런 권능을 부여했는가? 과거 ‘펄프 픽션’처럼 ‘영화제 그랑프리=흥행 성공’이란 공식이 통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부산영화제에서 ‘크로닉’이 찬사를 받아도 실상은 ‘영화제용 영화’를 찾는 관객과 다수 일반 관객의 취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다. 20년 전과는 달리 영화를 보는 경로가 다양해져서다. 요즘 관객들은 인터넷, IPTV 등을 통해 거의 무제한에 가깝게 영화를 접한다. 미국 넷플릭스(Netflix)의 약진이 이를 말해준다. 관객들은 더 이상 평론가의 찬사를 영화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참조사항일 뿐이다. 스스로 정보를 검색해 극장에서 볼 영화와 아닌 영화를 구별한다. 물론 전문가 뺨칠 정도의 아마추어 평론가들이 인터넷에 차고도 넘치는 현실에서, 영화평론의 ‘약발’이 예전 같지 않음은 아쉽다.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으로 멀티플렉스는 자신들이 만들고 유통시키는 영화에만 주로 자리를 내주고 있는가, 즉 스크린 독과점 문제다. 하루라도 극장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극장업의 본질은 호텔과 같다. 그날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면 다음 날 도저히 팔 방법이 없다. 재고와 반품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만들고 유통시키는 영화에만 주로 자리를 내주기는커녕 상대방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흥행작을 들고 오면 내 영화라도 내리고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안 하면 극장은 망한다. 물론 그래도 자사 영화를 ‘은근히’ 밀어주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립적인 감시기구에서 지속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60%의 고공행진을 하는 데는 이른바 ‘천만영화’의 기여가 컸다. 누군가는 이 역시 스크린 독과점 탓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순진한 얘기다. 관객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는 공짜로 보여줘도, 심지어 학점을 무기로 협박(?)해도 절대로 보지 않는다. 스크린 독과점론은 극장도 없는 쇼박스가 ‘도둑들’과 ‘암살’을, ‘구멍가게’로 시작한 N.E.W가 ‘7번방의 선물’과 ‘변호인’을 ‘천만영화’로 만든 반면, 명색이 국내 2위의 멀티플렉스를 가진 롯데가 왜 아직도 ‘천만영화’를 내놓지 못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법은 규제밖에 없는가. 영화가 문제라면 음악시장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멜론 같은 음원업체의 점유율도 40%로 제한하는 건 어떨까? SMYGJYP 등 3대 기획사의 음원 다운로드가 40%를 넘으면 자동차단하고, 방송 출연도 같은 비율로 규제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무한도전’은 홍대 인디 밴드 ‘혁오’를 발굴해 주류로 만들었다. 한때는 무도가요제로 음원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번엔 “큰 힘에는 언제나 책임감이 따른다(Great power always comes with greatresponsibility)”는 스파이더맨의 대사를 현실로 만든 경우다. 영화계도 ‘무한도전’을 참조하자. 대기업의 힘을 책임감 있게 사용해 제2, 제3의 ‘혁오’를 영화판에서 발굴하도록 하는 건 어떤가. CGV뿐 아니라 롯데도 예술영화 전용관을 만들라고 요구하자. 다양성 영화의 통로가 확장될 것이다. 이 방법이 규제보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인 영화계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김익상 서일대 영화과 교수·영화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