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타인의 방(기사)

70년대 풍경 그대로, 시간이 비켜간 예지동 시계골목

1400여 개 시계?귀금속 가게가 있는 서울 예지동 시계골목에 가면 수천원짜리 중국산 시계부터 수백만원짜리 스위스제 시계까지 구경할 수 있다. [오종택 기자]
예지동 시계골목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오후 1시30분을 가리키는 시침처럼 비스듬히 비껴 선 모습이다. 지난 15일 오후 광장시장 맞은편에 있는 시계골목을 찾았다. 거리에 들어서자 시곗바늘을 한참 뒤로 돌린 듯 옛 풍경들이 펼쳐졌다. 거리에 진열된 낡은 시계들과 색이 바랜 간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200여m의 좁은 거리엔 1400여 개의 시계·귀금속 가게가 밀집해 있다.

 이 골목은 1960년대 청계천변 상인들이 옮겨오면서 형성됐다. 사과궤짝 위에 시계를 고무줄에 묶어 진열해 놓고 팔던 게 시초라고 한다. 이후 귀금속 상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1970~80년대 혼수 마련을 위해 꼭 들러야 하는 장소가 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90년대 시계 기능이 포함된 무선호출기(삐삐)와 휴대전화의 등장은 이 골목에 경제적 타격을 가했다. 또 명품 예물 상권이 백화점으로 이동하면서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6년 재정비촉진지구 지정이었다. 이곳에 120m 높이의 빌딩을 짓는다는 계획이 세워졌지만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으로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인들이 인근 세운스퀘어로 옮겨 가거나 가게 문을 닫았다.

시계 수리 중인 이병수씨(위)와 62년 된 함흥냉면집.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시간의 정직함을 아는 장인들이 남았다. 50년 경력의 이병수(72)씨는 1~2평 남짓한 ‘전일사’에서 반세기 동안 시계처럼 반복된 삶을 살았다. “시계는 아주 예민한 장치라 손 감각만으로 고장 원인을 알 수 있어야 돼. 부품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서라도 고쳐야지.” ‘금룡사’ 장기홍(65)씨의 작업 받침대 옆엔 일본어로 쓰여진 주문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예지동의 시계 수리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라며 “일본 기술자들의 복원 의뢰도 꾸준히 들어온다”고 했다.

 예지동 골목은 카메라 애호가들에게도 명성이 높다. 솜씨 좋은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카메라 수리점 10여 개가 모여 있다. ‘대원양행’ 진열장엔 니콘FM2·미놀타X-700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기들이 빼곡하다. 주인 최용식(61)씨는 “내가 한 번 고친 카메라는 절대 잊지 않는다. 언젠가 많이 본 듯한 물건이 들어와 주인에게 물었더니 예전에 여기서 고쳤던 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라고 하더라”는 일화를 들려줬다.

 오래된 골목엔 전통 맛집들도 터를 잡고 있다. 1953년 문을 연 원조함흥냉면은 골목 중간쯤에 있다. 미식가들 사이에선 ‘서울의 3대 함흥냉면집’ 중 하나로 꼽힌다. 종업원 권창환(36)씨는 “제주·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오는 단골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예지동 골목 풍경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이 골목은 도시정비구역상 ‘세운4구역’으로 묶인다. 사업시행자인 SH공사는 여기에 호텔·오피스텔 등을 짓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상인들은 “층수 제한 때문에 사업성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지만 정든 골목을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보은사’의 시계 장인 기성도(69)씨는 “자꾸 옛 것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며 “서울시가 예지동 골목 보존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