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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기사)

[이데일리] 국립현대미술관장, 외국인은 왜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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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부장] 1969년 10월 하순이었으니 46년을 꽉 채웠다. 급한 대로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는 경복궁에 간판을 걸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과는 정녕 어울리지 않은 그림이었으나 ‘빛나는 목적’을 내세워 이상한 외형 따윈 눌러버렸다. 1910년대 이후의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전하고 많이 내보이자, 그렇게 현대미술의 길을 내고 제대로 다져보자는 것이었으니. 1986년 과천관이 생기면서 그제야 그럴듯한 모양새가 됐다. 다시 27년. 2013년 11월 개관한 서울관은 과천과 동떨어졌던 정서적 근접성까지 챙기며 현대미술을 향한 퍼즐을 비로소 완성했다. 때맞춰 중장기발전계획도 냈다. 키워드는 글로벌리즘. 세계 미술현장과 시차 없는 교류가 목표라고 외쳤다. 마침 들려온 조민석·임흥순 등의 베니스비엔날레 수상소식으로 어깨에 힘까지 주게 됐다. 관심? 없었다. 지원? 그게 뭔데. 늘 그랬던 ‘개인기’였지만 어쨌든 구색은 갖춘 셈. 그런데 결정적으로 하나가 빠졌으니, 관장이다. 

1년여간 비어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석을 채우기 위한 2차 공모를 시작하며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소란의 중심에 섰다. ‘외국인 후보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장관의 단언 때문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압축한 3명의 후보에 ‘진짜’ 외국인이 들었더라는 소문이 돌고 유력 후보자가 실체를 드러내자 미술계는 ‘불난 호떡집’이 됐다. 바르토메우 마리(49)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장이 그 주인공. 거기에다 그가 전직을 사임한 계기가 몇몇 매체에 돌면서 외국인 관장 반대론은 가히 증폭 중이다. 

그런데 외국인 관장이면 왜 안 되는가. 반대논리의 줄기에는 이런 비난이 매달려 있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어찌 알겠느냐’ ‘민족정체성과 철학을 파괴할 거다’ ‘한국인의 정신적 거점을 헤치는 행위’ 등. 과연 그럴까. 지난해 10월 전 관장이 직위해제되고 지금껏 공석인 게 ‘민족정체성의 붕괴’ 탓인가. 천만에. 민족은커녕 미술관 정체성도 못 건지게 한 학연·지연 등 내부파벌 탓이 크다. 한 가지 더. 전통에 입각한 한국인 관장이 스페인미술전을 기획하면 탁월한 ‘글로벌마인드’가 되는 거고, 스페인인 관장이 스페인미술전을 기획하면 ‘한국문화 파괴자’가 되는 건가. 정신적 거점만 따지고 있을 거면 ‘세계 미술현장과 시차 없는 교류’ 같은 미래를 도모하자는 발전방안에 동의해온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사실 이 계획의 행동대장으로 외국인 관장보다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겠는가. 그래도 못내 걸리면 미술계가 먼저 나서면 된다. 개인기로 이룬 성과에 ‘숟가락 얹기’ 말고, 끼리끼리의 파벌도 빼버리고, ‘인물’을 만들어내면 된다. 

전적이 공개된 마리 전 관장의 경우도 그렇다. 지난 3월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전 국왕을 희화화한 조각품 전시 파문으로 사임했다는 것이 알려진 전부.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아닥친 2008년 바르셀로나현대미술관에 임용돼 관람객을 15% 이상 늘리는 기획력과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8년간 관장으로 재임했다는 사실은 빠져 있다. 게다가 일부 언론이 문제삼은 것과는 달리 관장 최종심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사임하게 된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길이 막힌 문체부가 내민 마지막 카드란 얘기도 들린다. 이것도 아니다. 외국인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고려해야 할 첫 카드다. 잘한 선택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른다. 실패한다면 외국인 관장은 한동안 넘볼 수 없는 벽이 되겠지. 하지만 성공한다면 구태의연한 논란 따위쯤은 단번에 잠재울 수 있다. 어느 쪽이 위험한가. 무엇이어도 1년 내내 허우적거리고 있는 지금보단 낫다. 민족정체성? 한국철학? 누가 휘두른다고 깨질 거라면 이미 정체성과 철학이 아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