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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기사)

[한겨레] 견디라고만 하지 말고 야자만 시키지 말고 연극 한편의 숨통을

[한겨레] 청소년 키우는 ‘연극 체험’

지난해 11월 서울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에 올려졌던 청소년극 <비행소년 KW4839>(연출 여신동)의 한 장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갖고 있는 여행자’인 청소년들이 비행기 탑승을 기다린다는 설정이다. 화려한 조명과 몸부림에 가까운 춤사위 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를 무대에 담았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제공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20일 오후 3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서울 블루스퀘어 공연장은 관객들로 붐볐다. 그리고 무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2층 객석에는 ‘특이한’ 관객들도 섞여 있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
정서와 인성 발전에 도움
“머리 아닌 온몸으로 흡수”
공연계, 다양한 할인제도 운영
청소년극도 꾸준히 무대에
직접 제작 참여 체험도 가능


고교 1학년 김유라(17)양은 이날 경기도 이천에서 혼자 올라와 뮤지컬 공연을 봤다. 초등학교에서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무대의 ‘재미’를 처음 배웠다고 한다. 김양은 공연 뒤 “대극장은 처음 왔어요.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이번 뮤지컬은 ‘내 인생의 무대’로 기억될 것 같아요”라고 했다. 몇 줄 뒤에 앉아 있던 이시은(16·ㄱ중 3)양도 감동에 빠져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동생(12)과 둘이서만 극장을 찾은 이양은 “엄마가 학생 할인으로 지난달에 예매를 해뒀어요. 장발장이 어린 코제트를 이끌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어요”라고 했다. 이들 청소년은 이 작품이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얘기를 듣고 어른 동반자 없이 극장을 찾는 모험을 감행했다. 

학교와 학원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다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예술은 먼 나라 이야기다. 영화나 티브이 드라마로 간신히 숨통을 틔우거나, 간혹 아이돌그룹 콘서트에서 발산하는 정도가 전부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연극 체험’은 정서를 살찌울 뿐 아니라 인성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립국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유홍영 부소장은 “아이들은 연극을 보면서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흡수한다”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우리 공연계는 학생 대상의 다양한 푯값 할인 제도를 운영한다. 대형 뮤지컬 공연은 대부분 중고생과 대학생한테 30%의 학생 할인을 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의 경우 지난해 12월 매 공연마다 평균 85장 안팎, 모두 3400장의 표가 학생 할인으로 팔렸다. 국립극단은 ‘푸른 티켓’이라는 이름으로 기업 후원을 받아 원래 5만원짜리(아르석)까지 모두 1만원에 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올해 청소년 지원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할인을 해도 영화 관람에 견줘 여전히 비싸지만 극장의 문턱을 낮춘 건 사실이다. 

연극계 일각에선 ‘청소년극’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매년 4~5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이하 극연구소)가 대표적이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지난해 11월 무대에 올린 <비행소년KW4839>(연출 여신동)는 전년에 이어 두 번째 무대임에도 청소년 관객한테 큰 호응을 얻었다. 연극은 여러 청소년들이 공항에서 자신이 탈 비행기를 기다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연애, 게임, 학업 등 관심사도 다양하다. 터질듯한 음악, 몸부림에 가까운 춤, 비디오아트를 연상하게 하는 영상, 미리 녹음된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충고가 흘러나오면 그에 맞춰 청소년이 입을 뻐끔거리는 설정 등 여러 연극적 장치를 통해 청소년의 불안과 외로움, 공포, 사랑을 표현했다. 

이런 ‘연극 체험’이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극연구소의 ‘청소년 15인’ 사업에서 확인된다. 극연구소는 지난해 14~17살의 청소년 15명을 선발해 매주 금요일에 다양한 형태의 연극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청소년극 제작에 참여해 대사 등을 제안하도록 했고, 공연 뒤에는 자기 생각을 표현해 보도록 했다. 

청소년들은 이 시간이 무척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시연(17)양은 활동 후기에 “내가 많이 변했다. 처음엔 어떤 키워드가 나오면 뻔한 생각만 했는데, 지금은 주변을 둘러본다”고 적었다. 김영은(18)양은 “월화수목 학교에서 11시까지 야자를 하는데, 금요일은 나에 대해 탐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극을 보고 얘기 나누는 자리는 예쁘고 고운 말의 잔치였다. 우리말이 저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라고 했다. 김솔의(17)양은 “<비행소년>에는 ‘괜찮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에겐 이런 위로가 필요하다. 그래야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현실에서 청소년이 일 년에 한 번 좋은 무대를 체험한다는 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장벽이 겹겹이 놓여 있다. 당장 시간과 장소의 문제가 크다. 집에서 먼 곳에 있는 극장에 평일 저녁 8시 공연을 보러 간다는 건, 중·고교 학생 관객한테는 큰 부담이다. ‘좋은 연극’이 뭔지 제대로 알려주는 ‘어른’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분명 어딘가 좋은 연극을 하고 있을 터인데, 부모와 교사조차 관련 정보를 챙기기 힘들다. 처음엔 부모 등 주위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른들도 연극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익숙하지 않다. 좋은 연극을 함께 봤으면 요모조모 이야기 나눌 거리가 많을 텐데, 많은 부모는 “재미있었지.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데 그친다. 

근본적으로 청소년에게 맞는 연극 작품이 부족하고, 또 만들기도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청소년’이라는 말은 앞에 ‘문제’ 또는 ‘비행’이라는 말이 생략된 듯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극연구소 김미선 피디는 “청소년 자신들도 청소년 시기를 참고 견뎌야 하는 시기로 여긴다”며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품을 원하면서도, 막상 배우가 교복 입고 나오는 평범한 연극은 유치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예산 지원 확대 등 사회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기울여 연극 체험의 기회를 많이 만든다면, 또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기듯 극장에 떠넘기지 않고 함께 관람하고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더 튼튼하게 자랄 것이다. 극연구소 유홍영 부소장은 “아이돌 콘서트의 화려한 무대와 달리 좋은 연극은 자신과 대면하는 미적인 체험이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근육을 길러야 하는 시기인 만큼 좋은 연극은 평생의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