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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방(기사)

[세계일보] 시간의 추억이 머문 섬 ‘입정동’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23〉인지 부조화
# 오래된 것에 대한 상반된 입장

오래된 것은 지저분한 것이고 누추한 것이다. 혹은 오래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편안한 것이다. 오래된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이렇게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에 따른 상반된 가치를 그때그때 편리하게 적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도시 재개발에 관한 어정쩡하고 묘한 입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때 우리나라가 근대화와 현대화를 동시에 이루어야 했던 시점에서 오래된 것, 낡은 것은 불편한 장애물이라는 관념이 아주 깊숙이 심어져 있다. 물론 오래된 시설물이나 마을은 구조와 안전에 대한 보완과 개선이 필수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대형개발과 연계해서 도시의 역사적인 가치를 당대의 재산적 가치 증식과 교환하고자 하는 자세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이 내린 폐허 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입정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들의 체온이 느껴지는 일종의 생태계와도 같았다.
어이없게도 우리는 오래된 동네를 갈아엎어 아파트촌을 만들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쉬는 날이면 오래된 동네로 놀러가서 사진을 찍고 커피를 마시고 여러 경로를 통해 오래된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한다.

지금은 성장의 속도가 다소 완만해졌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던 시절인 1960년대는 마치 사람이 청소년기를 지나는 것처럼 무척 빠른 속도로 나라가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을지로3가 주변인 입정동이 나의 고향이다.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중인계급이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갓을 만들던 장인들이 있던 집에 우물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대한 기억은 나에겐 없고, 다만 내가 태어날 당시에는 을지로쪽이나 청계천쪽 즉, 대로에 면한 부분에는 상가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 안쪽에는 일반 살림집들이 있는 전형적인 서울의 평범한 동네였다. 만화가게도 있었고 솜틀집도 있었고 기름집도 있었고 문방구도 있었다. 또한 공터도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흙밭을 뒹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활발히 성장하면서 을지로통도 무척 빠른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집들은 하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기계로 쇠를 깎아 여러 가지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당시는 중공업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부르짖던 시절인지라, 쇠를 깎아 기계부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굉음은 우리의 성장과 발전을 축원하는 찬가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살림집들이 줄어들면서 당연히 학교의 학생 수가 줄어들어 학교가 하나씩 문을 닫고 사람들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해야 했다. 우리 집은 아현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여 선장인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톰슨가젤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모습을 온 동네사람들이 입을 벌린 채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보았으니 아마 1969년 언저리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을지로 주변이 상업화되며 한 시절을 보내고, 그 사이 우리나라는 내부적으로나 외형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시간은 5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이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기계가 채웠던, 말하자면 ‘산업화의 역군’들이 나가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마치 사람의 몸에서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듯, 도시 또한 어느 기간 동안의 역할이 끝나고 이제는 다른 내용으로 그 장소가 채워져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입정동 안에 들어가면 조선옥, 을지면옥 등 유명한 식당들의 간판과 함께, 서울의 여느 번화가만큼 혹은 신도시의 상가건물처럼 많은 간판들이 붙어있다.
#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입정동에 간다. 별다른 이유가 없이도 가고 일부러 이유나 목적을 만들어서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감정이 아주 원초적인 고향에 대한, 자신의 근본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가보아도 하루 종일 소음이 떠돌고, 바닥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물들이 파인 웅덩이마다 흥건하지만 마음은 정말 편하다.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이 여전하고, 조금 안색을 바꿨지만 내가 살던 시절의 골목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분위기 역시 여전하다.

이번 여름에 대학교 건축과 학생들과 입정동을 조사할 기회가 생겼다. 일주일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도시의 한 장소를 학교에서 혹은 책으로 배우는 것과는 달리 몸으로 부딪쳐보고 읽어보는 작업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토건세력’들은 서울의 구도심을 어떻게 개발하여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에 골몰하면서 여러 가지 청사진을 펼쳐놓고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리고 서울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시간을 낡은 것, 더러운 것, 낙후된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누구도 그 명분에 반대할 수 없도록 무력화시킨 다음, 외곽부터 차근차근 지워나가고 있다.

그 세력들은 서쪽에서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근처 수하동, 삼각동부터 시작해서 수표동 근처까지 진격했고, 동쪽에서는 동대문운동장역에서 시작하여 훈련원로 근처까지 진격했으니 이는 거의 군사작전을 방불하게 한다.

피난민의 어수선한 천막처럼 개발을 앞두고 아직 옛 길과 오래된 집들의 흔적을 간직한 채 웅크리고 있는 입정동 일대를 거닐며, 그 풍경을 현대의 전쟁과 비유하며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벌어지는 전쟁의 비인간성은(물론 전쟁에 인간적인 전쟁이란 있을 수 없지만) 대면하지 않고 사람들을 살상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한참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던 시절 방영된 어떤 텔레비전 프로에서 무척 충격적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무인폭격기를 운전하는 한 조종사는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둔 미국의 평범한 가장이다. 그는 아침에 식구들과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자동차를 타고 기지로 출근한다. 그리고 회사의 업무를 보듯 자리에 앉아서 모니터로 공격할 대상을 보고 버튼을 눌러 폭탄을 투하한다.

그가 버튼을 하나 누를 때마나 여러 집이 무너져 내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 멀리서 그것도 해상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화면을 보며 폭격을 조종하는 사람은 그 마을의 냄새도 그 마을의 소리도,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람들의 아우성이나 표정도 읽을 수 없다.

단지 공격대상과 목표달성에 대한 선택과 실행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가장은 업무를 끝내고 다시 자동차를 몰아 집으로 퇴근해서 손을 씻고, 온 가족이 평온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보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도시 재개발 역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 대한 고민이나 그 안에 담긴 세월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축척이 큰 지도를 보고 선을 그어 길을 만들고, 깨끗한 건물을 새로 세우는 것. 그것은 원격 무기로 살상을 하는 현대전과 별다를 것이 없다.

서울의 원 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을지로 통이나 청계천 좁은 골목을 버스나 전철로 지나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 대학생들은 대부분 아파트에서 나고 아파트에서만 자랐다고 했다. 그동안 건축을 전공하고 도시의 이런저런 양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지만, 그 골목에서 맞닥뜨린 풍경에 약간은 놀라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리며 낯설어했다. 그러나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만나게 되며 모두 180도로 마음이 바뀌었다. 

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끓여 목욕탕을 운영하던 입정동의 청계목욕탕은 지하철이 개통된 뒤 물길이 끊어지며 운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 골목길 생태계를 발견하다

입정동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무척 불안하게 살고 있다. 그곳은 재개발 지구로 지정된 후, 마치 지금 살아있는 나무들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만 존재하며 새순이 돋아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숲과 같은 곳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개선이나 이주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마치 도심 속의 섬처럼 유리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으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들어온다. 그리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고 너무나 먼 서울의 저편에서 자란 대학생들이 가장 더운 여름 한복판, 8월 첫 주에 입정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인터뷰에 의하면, 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끓여 목욕탕을 운영하던 청계목욕탕은 지하철이 개통되며 물길이 끊어지며 운영을 중단했다고 한다. 60년 된 중화요리집 오구반점은 화교 출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이고 가족이 같이 운영한다.

특히 다방은 입정동을 가로세로로 엮어주는 베틀과 같은 곳이다. 다방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이야기들이 완성된다. 응접실다방, 민들레다방, 순정다방, 민다방, 둥지다방, 타임다방, 화성다방 등이 있는데 서로 단골이 겹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영역 구분이 있다고 했다. 아침 여섯시에 출근한 그들에게 다방의 하루는 ‘수건돌리기’로 시작된다. 늘 땀에 젖는 가게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보통 50군데 정도의 단골에 손수레에 실은 수건과 페트병에 담긴 물을 돌리는데, 하루 평균 70∼80군데 배달을 나가기도 한다.

또한 그 안에는 안성집, 조선옥, 을지면옥 등 유명한 식당들도 있지만 외지인이 주로 오고, 주민들은 간혹 동네 경조사 때 나름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서울의 여느 번화가만큼 혹은 신도시의 상가건물처럼 많은 간판들이 붙어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은 요즘 보기 드문 붓으로 그리고 쓴 간판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간판은 1960∼70년대에 용도 폐기되었기에, 그 시절의 간판이 아직도 남아있나 하고 생각했으나 상태가 너무나 깨끗해서 의아했다. 들어보니 3년 전까지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붓글씨로 철판 위에 간판을 그려주던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어느 날부터인가 돌연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입정동에는 구멍가게도 여러 개 있다. 보통의 구멍가게는 군것질거리부터 생필품까지 아주 잡다한 물건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곳인데, 이곳에서의 의미는 좀 다르다. 그곳은 술을 먹는 주점이며 간식을 먹는 분식센터이고 식사를 하는 식당이다. 또한 동네의 많은 이야기를 듣는 마을회관의 역할도 한다.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구멍가게의 연세가 지긋한 어머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시고, 40대 후반의 딸은 라디오를 듣거나 법률, 의학, 경제 등의 전문서적을 읽으며 소일한다는 이야기도 무척 유쾌했다. 입정동에서 태어나고 입정동에서 자란 딸은 지금은 없어진 영희초등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이전한 숭의여고를 다녔다. 친구들은 모두 이사했고 입정동이 아주 잘 나갈 때는 일주일에 담배를 150만원어치나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가게 앞에서 막걸리, 소주, 맥주 등을 마신다. 세기슈퍼 역시 50년 가까이 영업을 했지만, 지금은 김밥이나 분식류를 판다. 주민들은 70년대의 호황을 회고하며, 그때는 매일 야근철야를 했으며 한 달에 두 번밖에는 쉬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만남을 통해 학생들에게는 자신들이 만난 실명의 존재들과 장소에 대한 자각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이 동네는 개발을 하지 말고 꼭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조금 흥분하기도 했다. 

아직 누군가 사는 집이 한 채 남아 있었고, 종일 일을 하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커피를 먹는 일상이 있는 곳, 어둠이 내린 폐허 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들의 체온이 느껴지는 일종의 생태계와도 같았다. 

도시란 개발의 대상이 아니고 자본의 꽃밭도 아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에 대한 약간의 존경과 시간에 대한 경외가 있다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가장 먼저,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